고민. 연애


이따금씩 엄마가 남자친구에 관해 물어보곤 한다. 지금껏 남자친구의 존재를 짐작으로는 알고 있었어도 그 이상의 관심은 갖지 않았던 엄마였지만, 남자친구가 나와 같은 직업을 갖게 된 것을 계기로 그의 존재를 내 입으로 밝히고 나서부터는 조금씩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것들을 질문하곤 한다. 질문이라고 해도 '참, 그러고보니 걔는' 하고 문득 궁금해진 것을 물어보는 정도지만.

그러나 그런 관심에 무색케도, 나와 남자친구는 지금 일종의 조정 기간을 갖고 있다. 내 머릿속은 전에없이 복잡하다. 어떤 웹툰의 대사처럼 10분 생각하나 며칠 생각하나 어차피 결론은 헤어지냐 마느냐 둘 중 하나일 뿐인데도 그 하나를 선택하기가 너무 힘들다. 보통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라고들 하지만 지금의 판단으로는 어느 쪽을 선택해도 언젠가는 후회할 것 같다. 후회가 없을 수는 없는 일이니 그럼 다른 무엇보다 내 마음이 가는 쪽을 선택하라 한다면- 사실은 그게 가장 문제다. 내 마음은 어느 구석에 홀로 처박혀 있는지 이런 상황에서도 고개 한번 들지 않고 침잠한 채이다.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불러도 쳐다보지 않는다. 그나마 일에 여유가 있을 때, 더 바빠지기 전에 생각하는 게 좋다고 암만 설득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도 내가 답답하다. 밖에서도 집에서도 잘 사귀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데 정작 내 속은 그렇지 않으니까. 심지어 방금 전엔 남자친구의 사랑한다는 인사에 무심코 나도 사랑한다고 대답해버렸다. 말해놓고 나서야 어,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건가 싶더라. 그게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으면 나는 복잡해지기를 멈출 수 있지 않았을까.. 남자친구는 그게 습관에서 나온 말이라도 기쁘다고 했다. 나라면 안 그럴 것 같은데.

열흘 남았다.


골골골골


주말 전부 반납하고 야근, 매일매일 빨라도 11시는 넘어야 집에 들어가는 생활 한 달여. 처음에는 이게 뭐하는 짓이지 하는 생각도 간간이 들었는데 그것도 어느정도 지나니까 만성이 되었는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피곤하긴 한데 그렇게 괴로운 정도는 아니고, 다만 집에 가면 그제서야 피로가 몰려와 쓰러지듯 잠들었다 일어난다. 때로는 몸보다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이러다 진짜 쓰러지겠다 싶었는데 사람이 그래도 정말 쓰러지지는 않더라. 이게 모이고 모이면 언젠가 쾅 터질 것 같은데, 같은데 하던 중에 인원이 충원되고 업무분장이 바뀌어 겨우 토요일 정시퇴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일이 더 남아있는데다 조만간 새로운 일을 추가로 하게 되겠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은 아니고, 무엇보다도 조금이라도 잠을 자고 싶어서 냉큼 빠져나왔다. 일요일에도 쉴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가.


일. 생활


- 일할 때는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고 병원에 가도 한달이 지나도록 낫지 않았는데, 연휴 직전에 감기에 걸리고 집에서 쉬고 있으니 사흘만에 감기가 뚝 떨어졌다. 업무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란 얼마나 놀라운가.

- 학교 + 회계 + 권위주의의 삼각진 안에 들어앉아 있자니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 어쩌면 이렇게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들 사이에 콕 끼여있게 될 수가 있는지. 이 속에서 나는 정말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다.

- 화가 난다거나 불쾌하다거나 짜증스럽다거나, 이런 감정들은 바닥에 가라앉아 올라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표면을 감싸고 있는 것은 불편함이다. 내게 주어질 자리가 아닌 자리에 다양한 외부요인들로 인해 반강제로 앉아있게 된 것이 그 근원이라 생각한다. 내가 내 자리를 불편하게 여기는데 업무가 원활하게 돌아갈 리가 없다. 버겁기도 하고 곤란하기도 하다.

- 모르는 건 너무 많고 가르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게 일반적인 신입 직장인들의 공통적인 문제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왜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든 잘 헤쳐나가고 있는 것 같지? 난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는데. 미스터리로세.

- 어디서는 일을 너무 융통성 없이 딱 맞게만 처리하려 든다는 얘길 듣고 또 어디서는 너무 안일하게 아무 생각 없이 일한다는 말을 듣는다. 차이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전자는 내가 원칙과 선택지와 선택의 결과에 대해 정확히 아는 부분이고 후자는 내가 선택지만 알 뿐 원칙도 결과도 제대로 모르는 부분이었다. 결국 확신을 가질 만큼 알고 있는가의 문제.

- 어디서건 공부를 해야 한다. 그건 불만없는데, 자꾸만 자꾸만 주눅이 들어 그게 골치다. 나도 내 어깨가 처지는 걸 알겠다. 일단 웃고는 있는데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 2월은 또 엄청나게 바쁠 것 같다. 1월도 바빴고 야근을 해도해도 일이 남던데 큰일이다. 아. ( ..)


일하다. 생활


돌이켜보면, 면접관이 이런 질문을 했었다. 여기 들어와서 이루고 싶은 꿈이 뭐냐고. 솔직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는데도 대답은 또렷이 나왔다. 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아, 그 사람 잘한다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당장의 꿈이라고. 가끔은 참 소심한 대답이었다 싶기도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그게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바른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시인에게는 삼림욕이 필요하다. 연애



내 어깨를 감싼 손에서는 부드러운 시어버터 향이 난다. 그에 허리를 안아 기대면 은은한 비누 향이 난다. 사람 많은 거리에 또 한 사람이 곁에 다가선 것만으로도 공기가 달라진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향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매연 가득한 도로 위를 콜록이며 걸어다니다 한순간 상쾌한 숲으로 들어선 듯한 느낌. 숨이 편히 쉬어진다. 지금 숨을 쉬어 내 폐로 들어갈 공기에 무엇이 섞여 있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어딘가에 예기치 않게 들이마시게 되는 타인의 담배 연기와 같은 거짓이 숨어있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속에 불안이 없으면 사람은 솔직해진다. 나는 떠들기도 하고 웃기도 하다 기대어 까무룩 잠들기도 한다. 문득 눈을 뜨면 그 앞에는 다정한 눈빛이 나를 향한다. 그는 녹색이 좋다고 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갈색 가방과 갈색 지갑을 든다. 나무냐, 하고 웃으며 나는 정말로 그가 나무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나무보다는 오히려 숲에 가까울지 모른다. 나무 한 그루가 곁에 있다고 해서 숨쉬기가 이렇게 편해지지는 않을 테니까. 숨을 쉰다. 포근한 이 산소를 한껏 들이마시는 것만으로 눈치를 보고 본심을 숨기는 법을 배우며 쌓였던 불쾌한 기분이며 울적한 생각들이 사그라든다. 괜찮아,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어쩌면 나는 조금 더 정직하게 살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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