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0일
꿈 : 살인마들.
세상에 그들이 나타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지칭할 어떤 말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 킬러니 닌자니 하는 말들을 갖다붙였지만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 걸맞는 이름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그런 이름은 너무 감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반 공식적으로 그들은 암살자로 불렸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을 몰래 죽이는 일이 없었다. 어떤 일을 몰래 한다는 것은 그 일에 대해 세상에 알려지는 데 거리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자신들이 알려지는 것에나,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일부 사람들은 쉬쉬하면서도 그들을 살인마라 불렀다. 그 어감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에 그 호칭은 공식적으로 쓰이지 않았지만, 나는 살인마야말로 그들을 표현하는 정확한 말이라 생각했다.
아무도 그들이 무엇인지 몰랐다. 인간인지 인간의 변종인지 아니면 새로운 그 무엇인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뜻 보기에 인간과 비슷한 모습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신체 능력은 인간을 훨씬 능가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빨라서 때로는 송곳이나 화살 비슷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송곳이나 화살 같은 것으로 변신할 수도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의 모습은 정형적이지 않았다. 혹자는 그들이 물건이나 혹은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것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일 때만 사람들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해 단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건 그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는 거였다. 그들은 마치 사람을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갖고 있는 확인할 수 없는 기이한 능력들까지도 오로지 사람을 죽이는 데 최적화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들은 동정이나 연민과 같은, 사람을 죽이는 데 있어 방해가 될만한 감정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사람들이 그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 그들이 사람을 죽이는 순간 그들은 항상 즐거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물론 그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네끼리 죽이는 것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반드시 어느 한쪽이 완전히 죽을 때까지 서로를 공격해댔는데, 실제로 이런 일은 드물었다. 서로 가진 능력이 비등한 탓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들은 그런 순간에도 신나게 웃어대고 있었다.
그들이 사람을 죽이는 데 어떤 기준이 존재하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살해된 사람들에게는 요만큼의 공통점도 없었다. 단 한번, 그들을 추종하는 일종의 종교 세력이 생긴 적이 있었다. 그 종교 지도자는 그들이야말로 이 세계의 종말을 부를 신의 대행자, 즉 천사들이라 주장했다. 그 종교에 귀의하면 그들의 단죄 - 그는 그들의 살인 행각을 그렇게 표현했다 - 에서 벗어나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이 그 종교의 핵심이었다. 그들이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아무때나 나타나서 사람들을 죽이고 사라지는 그들의 존재에 대해 혼란을 느낀 사람들이 그런 설명에 납득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곧 엄청난 수의 신도가 생겼다. 신도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그 종교 지도자는 갓 세력이 커지기 시작한 신흥 종교가 흔히 하듯 거대한 집회를 열었다. 참사가 일어난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 집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갑작스레 나타난 그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들은 마치 개미집을 발견한 아이들처럼 기뻐하며 사람들을 도륙했다. 제일 먼저 살해당한 것은 종교 지도자였다. 하지만 그건 그가 지도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눈에 잘 띄는 화려한 옷을 입고 가장 높은 단상 위에 홀로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집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도 하나하나 찾아가 죽였다. 그 이후 그들에게 죽임당하는 것이 곧 구원의 길이라 주장하는 세력도 일부 나타났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그들의 살인은 어떤 의미나 이유가 있다고 보기엔 너무 무차별적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든 그들에게 모조리 살해당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전히 언제 어느 곳에 나타날 지 모르는 그들을 두려워하며 시간이 흘렀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들 사이에는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우리가 그들에게 '의뢰'를 할 수 있다는. 방법은 간단했다. 단지 인터넷에 누군가를 죽여 달라는 글을 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비공개여도 상관없었다. 길지 않아도 되었다. 단 한 문장, '-를 죽여줘'라는 단 한 마디만으로 그 말은 이루어졌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룰이 있었다. 내 의뢰가 그들에게 받아들여져 내가 죽여 달라 부탁한 사람이 살해되고 나면, 그들 중 그 의뢰를 수행한 이가 나를 찾아와 나를 죽인다는 것이었다. 만일 여러 사람을 죽여 달라 의뢰했다면 그는 나를 시작으로 내 가족, 친척, 친구들 순으로 내가 죽여 달라 요청한 사람의 수만큼을 죽이고 떠난다는 것이다. 만일 이때 찾아온 암살자와 맞서 싸워 그를 죽일 수만 있다면 나는 살 수 있다. 처음에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나타나 사람을 죽이고 사라지는 것이 누군가 몰래 인터넷 어딘가에 써갈긴 요청 때문이라는 것은 상식적인 설명이 될 수 없다고들 믿었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한들, 누가 그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제 목숨을 담보로 잡겠는가? 인간이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소문이 퍼질만큼 퍼진 이후 이번에는 또다른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살인 의뢰를 하고도 죽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그리고 조금 더 가능성이 높은 방법에 관한 소문이었다. 의뢰를 하고, 내 의뢰가 수행된 후 '암살자'가 나를 죽이기 위해 찾아오기 전에 그 암살자를 죽여 달라는 새로운 의뢰를 해야 했다. 그러면 그들끼리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살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내가 살 수 있으려면 처음 의뢰를 수행한 암살자가 그들간의 싸움에서 이겨야 했다. 그가 자신을 죽이러 온 다른 암살자들을 이기고 살아남으면 그는 의뢰인을 죽이러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져서 죽는다면, 그를 이긴 이들은 다시 나를 죽이러 찾아온다. 이때는 그 전에 그들을 죽여달라는 의뢰를 또 하면 된다. 마치 카드 돌려막기처럼, 언젠가 전 단계의 암살자가 이겨서 그 순환이 끊길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다.
확실히 '살아남을 지도 모르는' 방법이 제시되자 여기저기서 확인해 보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정말로 그런 방법으로 의뢰를 하고도 살았다는 사람의 증언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헀다. 비슷한 시기, 자기네끼리 싸워대는 그들의 모습이 예전보다 자주 목격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점차 그 소문이 진실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뢰하는 사람이 느는 만큼 그들에게 죽는 사람도 늘어났다. 어떤 사람은 같이 사는 부모를 죽여 달라는 의뢰를 했다. 의뢰는 단시간에 수행되었다. 그리고 의뢰를 수행한 암살자는 다른 방에 숨어있던 그가 미처 다른 암살자에게 의뢰를 하기도 전에 그를 찾아내 죽였다. 다른 암살자에게 암살자를 죽여 달라는 요청을 할 수 있는 건 반드시 첫 의뢰가 수행된 후 그가 자신을 죽이기 전이어야 했는데,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에 그 사이 시간에 적절하게 새로운 의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설령 새로운 의뢰를 했다 하더라도 새로운 그들이 오기 전에 살해당하는 경우도 적잖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명 무언가 의뢰를 한 모양이다. 누구를 죽여 달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죽이고자 한 사람이 한 명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엄마의 안전을 제일 먼저 걱정했을 리가 없으니까. 나는 기억나지 않는 이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재빨리 새로운 의뢰를 작성했다. 글을 올리고 문득 돌아본 내 방 베란다 너머에서 무언가 빨갛고 하얀 것을 보았다. 종이조각을 얼기설기 이어붙인 것처럼 생긴 그 무언가는 허공에서 가만히 일렁이는 듯 하면서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까르르 하는 웃음 소리가 언뜻 들린 것도 같았다.
그들에게 맞서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그들을 죽이거나 혹은 그 비슷한 상태로 몰아갈 수 있으리라 짐작되는 것은 그들이 그들끼리 싸울 때 사용하는 독침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정작 자기네끼리 죽일 때 본인들의 능력을 직접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들은 거의 언제나 독침 비슷한 것을 이용해 서로를 죽였다. 수없이 많은 독침을 총처럼 쏘아댈 수 있는 작은 무기- 그들은 동족을 죽이고 나면 어째서인지 그 무기를 버리고 사라졌다. 당연히 그 무기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고 똑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무기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독침이 얼마만큼의 성능을 내는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이야기가 달랐다. 가끔 급소로 보이는 곳을 여러번 맞추었더니 금세 죽어 사라지더라 하는 이야기도 돌았지만 확실치는 않았다. 독침의 성능이 확실치 않은 것은 그들끼리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독침 몇 대를 맞았을 뿐인데 죽어 사라지는 이도 있었고 온몸이 독침 투성이가 되고도 멀쩡하게 움직여 상대방을 죽여버리는 이도 있었다. 진짜도 그러한데 하물며 그 무기의 복제판은 어떻겠는가. 그나마 한두 번 만으로는 안된다는 거, 상대가 고슴도치처럼 보일 만큼 엄청난 양을 쏘아대야 겨우 그들을 죽음 비슷한 경지로 몰아갈 수 있다는 것이 정설에 가까웠다.
의뢰를 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나는 그 무기의 복제판을 구입해 갖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손에 쥐고 있던 무기를 이용해 독침을 쏘아댔다. 제대로 조준하고는 있는지, 제대로 맞고는 있는 것인지 고민할 틈은 없었다. 내 새로운 의뢰를 받아들인 암살자들이 이쪽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똑똑, 방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 있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 일도 없어!" 나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나는 그가 얼마나 빠른지 알고 있었다. 이 방문이 조금이라도 열리면 그는 이 방을 빠져나가 아무런 무기도 없는 엄마부터 먼저 죽일지도 모른다. 나는 최대한 '머리'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제발, 그곳이 그의 급소 중 하나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그가 쓰러졌다. 그 정도로 죽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다가가는 순간 공포 영화 속의 살인마처럼 벌떡 일어날 지도 모른다. 그는 정말로 살인마니까. 두려움을 눌러참으며 책상 너머에 쓰러져 있을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엄마였다. 나는 꽥 소리를 지르며 방문을 밀어닫고 문을 잠갔다. 방금 노크를 했을 때 문을 잠가놓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문을 의자로 틀어막았다. 탕탕탕,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방금 그게 무슨 소리였냐고 외쳐묻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도 엄마는 문을 계속 두드려댔다. "알았어, 금방 나갈게! 문 앞에 서있지 마!" 그제서야 바깥이 잠잠해졌다. 상황이 정말 심각해졌다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최대한 빨리 이 일을 처리해야 했다. 무기를 손에 꽉 쥐고 책상 너머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방 안에는 빨갛고 하얀 무언가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문득 소름이 돋았다. 무서운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기만을 빌며, 그러나 과연 그 외의 상황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에 몸서리치며 나는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놀란 눈을 한 엄마가 서 있었다. 조금 힘이 빠졌다. "...문 앞에 서 있지 말랬잖아." "걱정되는데 어떡해." 엄마는 내 어깨 너머로 내 방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진짜 아무 일 없어?" "없어. 책이 한꺼번에 떨어져서 그래." "근데 문은 왜 잠가놔." "...몰라." 나는 다시 방문을 닫았다. 그들이 죽거나 혹은 쓰러졌을 때 어떤 상태가 되는지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개체마다 차이가 큰 탓도 있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의 시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소문만 무성할 뿐 확실히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껏 어째서 왜인지를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나는 방 안을 좀더 구석구석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엄마가 무사하다면 그건 분명 아직 이 방 안에 있을 터였다.
옷장 옆 구석에, 빨갛고 하얀 종이를 얼기설기 걸친 무언가가 처박혀 있는 게 보였다. 그건 마치 작은 마네킹처럼 보였다. 보이기만이 아니라 만졌을 때의 감촉도 그랬다. 내가 쏜 것이 분명한 독침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얼굴은 차갑고 딱딱했다. 정말로 죽은 걸까? 정말 이걸로 끝난 걸까? 고작 이 정도로?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쉬웠다. 내가 아주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행운이 온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나는 한가운데 독침이 꽂힌 채 커다랗게 뜨여 있는 그의 눈동자를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눈동자의 감촉마저도 피부와 마찬가지로 플라스틱 같은 느낌이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밥 먹을래?"
나는 머뭇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부엌에서 엄마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며 물었다. "혹시, 엄마는 뭐 이상한 거 못 봤어?" "이상한 거?" "내 방에서 뭔가 이상한 게 나왔다거나..." 엄마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거라..." "아니, 없었으면 심각하게 생각 안 해도 돼." "그래?" 엄마는 싱긋 웃었다. "뭐, 딱히 이상한 건 없었는데, 네 엄마가 있길래 먼저 죽이긴 했어. 그거 말곤 잘 모르겠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꿈에서 깼다.
......무슨 놈의 꿈이 이렇게 디테일해...orz
# by | 2009/11/20 23:54 | 생활 | 트랙백 | 덧글(2)



